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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隔世之感).(2) (★)▶[검]

潤盛 2021. 10. 4. 11:42



Music:삼포로 가는 길

격세지감(隔世之感).(2)

隔世之感 은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풍습이나 풍속이
크게 바뀌어
딴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 1. 수명.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환갑을
맞으셨다.

외삼촌들은
넓은 마당에 차양을 치고
멍석을 깐 후

여러 날동안
친척 친지,

이웃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때,
집안 어른이 환갑을
맞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그만큼 온 가족의
경사이기도 했다.

지금은
60이 노인 대접을
못 받지만
그때의
평균수명은 45-48세
정도였다.

지금의 과학은
인간의 최대 수명을
120세로 보고 있다.

신문에 게재되는
유명인사들의 부고를 보면
대부분이 90세 이후에
별세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오래 사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가.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 2. 출산과 자녀.



지금은 거의
모든 가정이 외동이다.

셋 정도 되면
원시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는
셋은 보통이고 다섯,
많게는
일곱인 집도 흔했다.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게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온 나라가
저출산 때문에
야단인 것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절로든다.

지금 저출산의
가장 큰 요인은
아이 기르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애하나
대학 입학시키고 나면
그 에미는
폭삭 늙는 세상이다.

? 3. 남존여비.



길을 가다
교차되는 지점에서
남녀가 만나면
여자 쪽이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길을 가다
여자가
남자 앞을 먼저 지나가면
'재수 없다' 고 했다.

여자들 이름 중에
'이월이', '삼월이',
'오월이' 등
출생한 달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허다했다.

남자아이가 나면
돈을 주고
작명소에서 작명했지만
여자애는 제대로 된
이름 갖는 것도 어려웠다.

불과 두 세대 전까지
그랬다.

? 4. 박정희 시대.



지금의
집권세력인 586을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김일성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이다.)

특히
박정희의 집권시대를
군부독재라고 부르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선전한다.

그런데
그 시절을 살았던
나와 내 친구들은
그때가 군부독재였고

시민이 탄압받았으며
여러 가지 생활의
제약을 받았다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특별히
불편했던 기억이 없다.



심리 적으로는
지금이 더 불편하다.
딱하나
불편했던 건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의
통행금지였다.

우리 모두는 그때
온몸으로 산업화 현장에서
일에 매달렸으며
나라가 발전하는
시대를 살았다.

조선 백성이 단군이래
하루 세끼
쌀밥을 배부르게 먹은 것도
박정희의 통일벼 덕이었다.

나는
그것을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 5. 군대.



근자 군대 급식이
문제가 되면서
음식이 담긴 식판의
사진을 보게 됐다.

내가 사병으로
최전방 부대에
복무했을 때 그런 식판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춥고 배고픈 자유당
군대를 생각하면
그렇다.

보리밥에 소금 된장국,
배춧잎 하나라도
들어있으면 횡재였다.

그나마 양이 적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서
우리들은 먹는 꿈을
많이 꾸었으며
나는 특히 중국집의
찐빵 꿈을 많이 꾸었다.

피복도 모자라
나는 USMC 표시도
선명한 미 해병대 군복
상의를 입고 있었으며

구두는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선물했다는 월남화를
신고 있었는데

위는 가죽이고
바닥은 쇠로 된 징이
박혀있는 구두였다.

? 6. 병원.



내가 어렸을 때
병원은 의사 한 분이
거의 모든
과목을 다 봤다.

글자 그대로 만병통치
선생님이었다.

내가
맹장수술을 했을 때
수술 후 쇠로 만든
둥근 틀을 배 위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었으며
가스가 나올 때까지
물을 마시지 못했다.

그 갈증은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내 옆 병상에도
내 또래가
맹장수술을 하고
누워 있었는데

부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애 할머니가

'독한 것들
애가 목이 탄다는데
물을 안 준다' 면서

손자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했다.

결국 재수술을 했다.

그때는
모든 내복약이 가루로
되어있어
지금의 정제보다는
먹기가 힘들었다.

? 7. 장유유서.



어른 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했고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술잔을 받아도
돌아앉아 마셔야 했다.

담배도
어른 앞에서는 피울 수
없었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차례'는
아주 엄격했으며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었다.

? 8. 넝마주이.



그때는
등에 망태를 메고
긴 집게를 들고 다니는
넝마주이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재활용을 위해
분리배출하는
모든 물건은

넝마주이라면
다 가져가는 것들이다.

그때는 특별히 버릴
쓰레기도 별로 없었고
넝마주이들은
가끔 남의 빨래를
훔쳐가곤 했다.

버릴 게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난하게
살았다는 얘기다.

? 9. 검은 지프차와
두루마리 화장지.




그때 고위 관료들은
미군에서 불하된
지프차를 개조,
검은색을 칠한 뒤
타고 다녔다.

조수석이 지정
좌석이었다.

그런데 좌석
앞 손잡이 옆에 걸게 가
있었고

거기에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흰색의 두라 마이
화장지를 걸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아직 화장지가 없었다.)

거의 모든 차가 그랬고,
그게 자랑이었다.

? 10. 파자마.



여름이면 집 앞에
평상을 내다 놓고
저녁때면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걸터앉아
모기를 쫓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때
파자마가 있는 사람은
그걸 입고 나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파자마는
귀했기 때문에 충분히
구경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상이었던
옛날 얘기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서구 기준으로도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잘살고 있다.

그래서 격세지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도 내일이면
다음 세대들에겐
격세지감이 될 것이다.

무식한 귀신은
부적도 몰라본다.
한국 속담.

? 좋은 글 중에서 ?


우리 벗님들~!
健康조심하시고
親舊들 만나
茶 한잔 (소주 한잔) 나누시는
餘裕롭고 幸福한
나날 되세요~^